나이가 드니 보수적이 된다?

40!공자가 말했던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 들면 누구나 속칭 ‘개똥 철학‘ 을 가진다 생각합니다. 벌거 벗은 몸으로 처음 세상에 나와 고단한 삶을 살아 오면서 겪었던 이러저러한 부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향후의 남은 삶을 보다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증가하다 보니 어느 새 자신만의 견고한 사상의 울타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겠지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은 점점 떨어지겠지만 젊은 시절 보다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시기이고, 점차 사회의 기득권을 누릴 때입니다. 새로움이 좋긴 하지만 현재 누리는 안정된 생활이 깨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점차로 사고 방식이 보수적이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보수‘라는 것이 결국 안전을 최우선하는 가치가 아닌가요?

존재 부정의 위기 상황

개똥 철학의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누려오던 껍질 속 안락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부정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믿고 있는 울타리가 하나 둘씩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믿고 있던 사실들이 하나씩 해체되면서 곧 나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 강제로 깨지고 그 안에 있던 원초적인 취약함을 지닌 ‘나’란 존재가 근원부터 삭제될 것 같은 무한한 공포심이 몰려옵니다. 그것도 직속 상사에 의해서 말입니다. 매일 사무실에서는 열띤 논쟁이 벌어집니다. ‘나’에 대한 공격에 맞서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칩니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다시는 재기가 불가능하고 ‘나’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못할 겁니다. 그런 과정이 거의 2개월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2개월 후, ‘나’는 정말 사라졌을까요? 아닙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었을까요?

‘나’는 무엇이었나?

  당시에 있었던 ‘나’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일까?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 보자면 현재의 ‘나’는 과거 치열하게 논쟁하던 ‘나’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정말 존재가 변화할까라는 의문은 철학자에게 넘기고 실제 내가 느끼는 존재의 변화에 대한 저만의 답은 ‘변했다’ 입니다. 그럼, 과거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잘 모릅니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당시에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을 하면서 느껴지던 공포심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개똥 철학을 포기하고 새로은 것을 받아 들인 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나’,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거짓된 자아였을 뿐입니다. 실재가 아닌데 실재라 믿었고 외부 세상으로 부터 신호를 받아 들일 때의 일종의 ‘맞춤 통로’였습니다. ‘맞춤 통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일종의 왜곡과 필터를 통해 보게하는 것인데, 지혜 명상을 하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니 공포와 혼란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과 비슷한게 ‘변화하지 않으려는 힘’이 ‘원복하려는 힘’과 심한 갈등 상태가 되다 보니 ‘변화하지 않으려는 힘’이 거셀 수록 충돌에 따른 폭발력이 크다 보니 내적인 고통과 공포심이 커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해체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으며 내가 믿고 있던 것이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나는 과거와 다릅니다. 이 점은 분명히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때를 회상하며 ‘왜 그랬을까?’ 라 자문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쳤어야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성숙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오히련 지금은 편안합니다. 느긋해졌습니다. 이전 습성이 사라지지는 않고 관성도 남았지만 내 자신과 주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다 자유로워졌습니다. 지혜 명상을 해 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